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영화’와 ‘드라마’를 구분하는 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영화는 극장에서 상영되는 2시간 안팎의 이야기, 드라마는 방송국을 통해 방영되며 회차를 거듭하는 이야기 구조라는 인식이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넷플릭스, 디즈니+, 왓챠, 티빙 등 다양한 OTT( 서비스가 등장하고 확장되면서 이 두 장르의 경계선은 점점 더 흐려지고 있다. 소비 방식, 제작 방식, 심지어 포맷까지 뒤섞이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지금 ‘경계 없는 콘텐츠 시대’의 한복판에 서 있다. 이 글에서는 OTT가 어떻게 영화와 드라마의 장르적 구분을 흔들고 있는지, 그 변화가 콘텐츠와 시청자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살펴본다.
플랫폼이 규칙을 바꾸다: OTT의 제작 패러다임
OTT의 등장은 단순히 영상을 스트리밍으로 감상하는 새로운 방식의 탄생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콘텐츠 제작의 패러다임 자체를 뒤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전통적인 영화는 극장 개봉이라는 목표를 염두에 두고 제작된다. 흥행 수익과 영화제 진출, 비평적 호응이 주요 기준이 되었고, 러닝타임이나 스토리 구조, 완성도의 기준도 이에 맞춰 조정되었다. 반면 드라마는 정해진 편성 시간과 광고 삽입 구조에 맞춰 에피소드 단위로 계획되었다.
그러나 OTT는 이러한 틀을 해체했다. 한 편의 콘텐츠가 꼭 90분 혹은 120분일 필요가 없고, 회차의 길이도 일정할 필요가 없으며, 심지어 시즌제로 확장되거나 스핀오프가 제작되는 등의 유연성이 가능해졌다. 넷플릭스의 대표작 ‘기묘한 이야기’는 시즌마다 에피소드 수와 길이가 다르며, 최근 시즌에서는 일부 회차가 장편 영화 수준의 러닝타임을 넘기도 했다. 디즈니+의 마블 시리즈들은 본래 영화로 출발한 세계관을 드라마로 확장하면서, 영화와 드라마가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결과적으로 OTT는 영화와 드라마의 ‘형식적 경계’를 해체하는 촉매제가 되었다. 콘텐츠는 이제 플랫폼 중심으로 기획되며, 장르나 포맷은 그에 따라 유동적으로 결정된다. 이것은 새로운 제작방식의 탄생이자, 전통적인 영상 제작의 질서가 재편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장편 영화인가 시리즈인가: 흐려지는 포맷의 선
OTT에서 소비되는 콘텐츠 중 많은 작품이 기존 영화 혹은 드라마의 정의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구조를 가진다. 예컨대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언급한 바 있는 "6시간짜리 영화"라는 개념은 이제 더 이상 상징적 표현이 아니다.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아이리시맨’은 3시간 30분이라는 장편을 넘는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극장이 아닌 스트리밍으로 공개되었으며, 시청자들은 이를 자유롭게 분할 시청했다. 이처럼 극장 개봉이 아닌 OTT 플랫폼을 통해 공개되는 작품은 굳이 영화인지 드라마인지 따질 필요가 없게 되었다.
또한, 최근에는 영화와 드라마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리미티드 시리즈’ 혹은 ‘미니시리즈’가 새로운 포맷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들은 보통 4부작, 6부작, 많아야 10부작 내외로 구성되며,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장편 스토리를 담고 있다. 이러한 콘텐츠는 영화처럼 고밀도이고 드라마처럼 서사적 확장이 가능하다. 대표적인 예로는 ‘체르노빌’, ‘퀸스 갬빗’, ‘비밀의 숲’ 시즌1 등이 있다. 이들은 짧은 회차 수로 한정된 이야기 구조를 가지면서도 캐릭터와 서사의 깊이를 갖춘다.
이처럼 콘텐츠는 더 이상 영화냐 드라마냐의 기준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든 스트리밍 플랫폼에서 ‘재생’을 누르기만 하면 된다. 포맷의 유연성은 시청자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주고, 제작자에게는 더 다양한 형태의 표현을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기존 방송사나 영화사에도 영향을 미치며, 전체 영상 산업 구조를 재편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야기 방식의 진화: 몰입형 구조와 서사의 확장
OTT의 핵심 전략 중 하나는 시청자의 몰입도를 극대화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이야기 방식도 진화하고 있다. 전통적인 드라마는 매주 한 편씩 공개되며, 시청자에게 다음 주를 기다리는 경험을 제공했다. 하지만 OTT는 대부분의 콘텐츠를 한 번에 공개하고, 시청자는 원하면 하루 만에 모든 회차를 연속 시청할 수 있다. 이러한 ‘몰아보기’ 시청 방식은 콘텐츠의 구성에도 영향을 준다.
기존 방송 드라마는 광고를 고려해 일정 시간마다 클라이맥스를 넣는 구조가 많았다. 하지만 OTT 콘텐츠는 광고 없이 감상되므로, 이야기의 전개는 보다 유기적이고 자유롭게 구성된다. 시즌 전체를 하나의 장편 영화처럼 기획하거나, 장면 전환이나 클라이맥스를 느슨하게 배치하는 방식도 가능해졌다. 이런 변화는 시청자가 더 깊이 몰입할 수 있도록 유도하며, 인물 간의 관계나 주제의식도 더 섬세하게 묘사할 수 있게 한다.
또한 OTT 콘텐츠는 글로벌 타깃을 의식한 서사를 통해 더 폭넓은 공감을 추구한다. 예컨대, 넷플릭스의 ‘오징어 게임’은 한국 사회의 문제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인간 본성과 자본주의에 대한 전 세계적 이슈를 담아내어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는 더는 특정 국가의 콘텐츠가 아닌 ‘세계 콘텐츠’로서 OTT 작품이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경계의 무너짐이 주는 기회와 도전
OTT가 만들어낸 영화와 드라마 사이의 경계 해체는 분명 영상 산업 전반에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창작이 가능해지면서, 다양한 장르 실험과 기획이 이루어지고 있고, 기존 방송사나 영화사에서 볼 수 없던 새로운 아이디어들이 현실화되고 있다. 독립 영화 감독들이 OTT를 통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장편 시리즈를 제작하거나, 한 편의 드라마로는 담기 어려운 이야기를 영화적 스케일로 연출하는 등 창작 환경 자체가 크게 확장되었다.
하지만 그만큼 도전도 함께 존재한다. 장르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시청자 입장에서 콘텐츠 선택의 기준이 모호해졌고, 스토리나 구성이 느슨한 콘텐츠도 늘어나고 있다. 특히, ‘이야기의 밀도’보다는 ‘화제성’에 집중하는 경향이 강해지면서 단순한 자극적 소재에 의존한 작품들도 늘어나고 있다. 이는 콘텐츠의 질적 저하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으며, 창작자에게는 보다 치열한 경쟁과 차별화의 압박을 안겨준다.
또한, 극장과 방송사의 역할이 축소되면서 전통적인 미디어 산업의 균형도 흔들리고 있다. 극장은 여전히 영화적 체험이라는 고유한 가치를 가지고 있지만, 대중의 관심이 OTT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상업영화 중심의 편향이 심화되고 있다. 이에 따라 중소규모 영화나 예술영화가 설 자리를 잃는 문제도 발생하고 있다.
결국, 영화와 드라마의 경계가 무너진 지금, 우리는 콘텐츠 자체의 힘에 더욱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형식이 중요한 시대는 지났고, 이제는 어떤 이야기냐, 어떤 감정을 건네느냐가 본질적인 경쟁력이 된다. OTT 시대는 그 어느 때보다 콘텐츠에 기회를 주는 시대이지만, 동시에 그만큼 냉정한 검증의 시대이기도 하다.
OTT가 영화와 드라마의 경계를 허물며 영상 콘텐츠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이제 시청자는 콘텐츠의 포맷보다도 ‘재미’와 ‘몰입도’, ‘완성도’에 집중하며, 제작자는 형식보다도 ‘이야기 그 자체’에 집중하게 되었다. 이 변화는 단순한 트렌드를 넘어서 콘텐츠 생태계 전반을 재편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그 변화의 정점에 서 있으며, 이 흐름 속에서 어떤 콘텐츠가 살아남고, 어떤 새로운 장르가 태어날지는 앞으로 우리가 함께 목격하게 될 이야기다.